마지막 입시 명문 세대, 현재 지도층으로 맹활약

시험을 보고 명문고에 진학하는 건 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입시 세대는 57년생 76학번. 이들은 현재 정치·사회 각 분야 최고 자리를 꿰차고 있다.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경기고 입시 마지막 세대인 72회 졸업생이다. 잘 알려졌지만 그는 사법·행정·외무고시를 통과한 수재다. 고교시절에도 비상한 두뇌로 급우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장학퀴즈’에서도 실력 발휘를 했다. 각종 어록을 남기며 입담을 과시하는 노회찬 진보정당건설 추진위원장(전 진보신당 대표)도 경기고 72회. 그는 고교 재학 시 쉬는 시간이면 앞에 나가 재미있는 얘기로 웃음을 줬다고 한다.

명문고 출신 76학번 유명인사는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경기고 마지막 입시 기수인 72회 졸업생 720명 가운데 교수는 169명에 달한다. 의사 88명, 법조인도 44명이나 된다. 서울고 28회(73년 입학) 동기생 중에서는 김성회 한나라당 의원, 임채민 국무총리실장,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등이 눈에 띈다. 한 기수 위인 27회에서는 윤영선 관세청장, 유진용 을지대 부총장(전 문화부 차관), 정유성 삼성전자 미래전략실 인사지원팀 부사장, 변재용 한솔교육 회장 등이 학창시절 두각을 나타냈다.

성윤환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박영일 전 과학기술부 차관(이화여대 교수), 승만호 서부트럭터미널 대표 등이 경복고 입시 마지막 세대(51회)다.

이른바 ‘뺑뺑이 1기(고교평준화 세대)’가 서울대에 입학하는 77년까지 입시 명문고가 명문대를 장악했다. ‘경기고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곧잘 회자됐다. 어떤 해엔 경기고 졸업식과 서울대 입학식 날짜가 겹쳤는데 경기고 졸업식이 끝난 뒤에야 서울대 입학식을 할 수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돈다. 경남고는 한 기수에 300명이 서울대에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고 75년엔 서울대를 포함 전국 3개 국립대의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경북고는 대통령(노태우), 국무총리(신현확), 국회의장(박준규·김수한), 대법원장(김용철)을 모두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서울만 놓고 보면 경기·서울·경복고의 명문 다툼이 치열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1900년 설립)가 전신인 경기고가 선두였지만 46년 개교한 신흥 명문공립학교 서울고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다. 주로 경기고가 가장 많은 서울대 입학생을 냈지만, 72년에 서울고가 이를 뒤집자 선배들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서울고 27회(72년 입학) 김병규 아모텍 사장(전 코스닥협회 회장)은 세 학교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기고생들은 공부를 매우 잘했지만 20~30%는 톡톡 튀는 개성이 뚜렷했다. 어떤 학생은 서울대를 갈 실력이 있는데도 배를 타고 싶다고 해양대에 지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고생은 무난한 모범생이 많았고, 경복고생은 서울고생보다 적극적이었다. 세 학교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입시 명문고라는 자부심으로 금세 친해지기도 했다.”

한 경복고 출신 졸업생은 이렇게도 비유했다.

“경기고는 서울대, 서울고는 연세대, 경복고는 고려대라 했다. 경기고는 공부만 하고, 서울고는 공부 잘하며 세련됐고, 경복고는 우직하며 공부를 잘했다.”

이처럼 경기·서울·경복고 등 세 학교 마지막 세대는 경쟁하면서도 우정을 다졌다. 이들은 2008년 ‘삼경151’이란 모임도 구성했다. 삼경(三京)은 세 학교가 서울에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151은 각 학교의 졸업기수를 합친 숫자다(경기고 72회, 서울고 28회, 경복고 51회).

부산에서는 경남고와 부산고가 세게 맞붙었다. 부산고는 경남 지역 시골 농사꾼 자녀가 많이 다녔다고 해 ‘부산농고’라고, 경남고는 부산 시내 상인 자녀가 많이 다녔다고 ‘경남상고’라고 불렸다. 대구와 전라도에선 경북고와 광주일고가 대표성을 가졌다.

강남 개발 붐 타고 8학군 부상

고교평준화 정책은 서서히 명문고 양상을 바꿔 놓았다. 평준화 정책이 시작되고 7년 뒤인 81년 서울대에 가장 많은 학생을 입학시킨 학교는 전주고다(178명). 대전고, 진주고, 마산고가 각각 140명씩 보내며 뒤를 이었다.

춘천고와 청주고도 70명 이상의 합격생을 냈다. 세칭 명문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들 지역이 두각을 나타낸 건 서울·부산(74년 평준화 실시)과 대구·광주·인천(75년 평준화 실시)에 비해 뒤늦게 평준화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입 시험을 치른 우수한 학생이 많았다.

서울에도 변화가 있다. 대일고가 89명의 합격자를 냈고 중앙고, 경성고, 서라벌고, 우신고, 여의도고, 경신고 등이 50명씩 서울대를 보냈다. 경기고와 서울고는 겨우(?) 40명을 보냈다. 뺑뺑이 5년 차 시절 두 학교는 서울에서조차 3류 고등학교(?)였던 셈이다.

평준화가 확산되면서 지역 명문고 위상도 달라졌다. 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 지시를 내렸다. 그 확실한 방안은 서울 도심의 명문고를 강남으로 옮기는 것.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으로, 서울고도 서초동으로 옮겼다. 이후 강남·서초 지역에 고급 아파트촌이 형성되면서 경기·서울·휘문고 등 옛 명문고가 영화를 되찾았고 상문·현대·청담·단대부속·반포·서초고 등 신설 학교도 빛을 냈다. 8학군으로 불리는 이 학교들이 서울 주요 대학의 신입생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경북고는 대구의 강남 8학군이라는 수성구로 학교를 이전해 그나마 ‘명문’의 타이틀을 유지했다. 하지만 옛 교사를 유지한 부산 경남고와 부산고는 신흥 도시인 해운대구 학교에 밀렸다. 강북에 그대로 남은 서울 경복고도 경기·서울고와 견줄 수준을 지키지 못했다.

84년 대원외고 신설 이후 특목고 시대 열려

그러나 8학군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84년 개교한 대원외고가 8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특목고의 모습을 드러냈다. 대일외고와 서울과학고 등도 특목고군(群)을 형성하며 위용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94년 대원외고는 186명, 서울과학고는 132명의 서울대 합격생을 냈다. 과거 경기·서울·경복고의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아직 평준화되지 않은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소도시 학교들도 명문고 타이틀을 얻었다.

올해 대학 1학년생이 치른 2011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을 보면 그 변화상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언어·수리·외국어 영역의 표준점수 합계 평균 기준으로 상위 30곳 중 외고, 과학고, 국제고 등 특수목적고가 25곳, 자립형사립고(자사고)는 3곳이다. 서울 대원외고 성적이 가장 좋은데 하위권과 비교해 두 배 이상 점수 차이를 보인다.

일반고는 비평준화 학교인 공주한일고 한 곳뿐이다. 이처럼 특목고와 자사고 강세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8학군 신흥 명문고 졸업생(73년생)의 얘기다.

“92년 공부 꽤나 한다는 재수생이 몰렸던 종로학원에서 동창 모임을 가진 적 있다. 많이 모여 봐야 수십 명이면 되기 때문에 어느 명문고도 식당 하나 정도 빌리면 됐다. 그러나 대원외고 출신은 몇백 명이라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학원 옥상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때 대원외고의 힘을 느꼈다.”

대원외고 1회 졸업생은 68년생으로 아직 고위직에 오를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특목고 출신들이 40대 후반이 되는 5년 뒤쯤이면 각종 요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엘리트 관문이라는 고시 합격생을 보자. 지난 5년간 사법고시 합격자 대원외고(163명), 한영외고(66명), 대일외고(44명) 등 한 학교에서 1명도 내기 힘든 사법고시 합격자를 특정 고등학교가 휩쓸었다.

행정고시도 비슷하다. 지난해 행시에 합격해 올해 부서 배치를 받은 신임 사무관 297명의 출신고를 살펴보니 합격자 수 상위 20위에 특목고가 11곳이 포함됐다. 대원외고(11명)를 필두로 명덕외고(8명), 경기과학고·한영외고(이상 6명), 대일외고(4명) 등 상위 1~5위를 특목고가 휩쓸었다. 경기·서울고는 합격자가 1명뿐이다. 경북·용산고는 1명도 없었다. 특목고 돌풍은 외무고시에서 특히 거세다. 2005년 합격자 19명 중 특목고 출신이 6명(31.6%)이었고 지난해는 합격자 18명 중 7명(39%)이나 됐다.

경기·서울·경복고가 ‘삼경’이라는 단어로 묶였듯 외고 출신들도 학교를 가리지 않고 서로 단합하는 모양새가 뚜렷하다. 대원외고 출신 미국 명문대생의 얘기다.

“유학 가보니 역시 외고 출신들이 많더라. 어느 외고인지 가리지 않고 외고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공감대가 형성돼 어울렸다. 명문고 출신이라는 자부심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이런 특목고의 부상을 바라보는 전통 명문고 출신들 감정은 사뭇 복잡하다. 마지막 입시 세대로서의 자부심은 여전하지만 전통 명문고 학맥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또 특목고 출신들이 지나치게 학업에만 매진에 전통과 낭만이 사라졌다는 얘기도 꺼내놓는다. 평준화 이후의 후배를 맞는 기분도 사람마다 다르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03호(11.04.27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