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제주로 갔다. 그때가 제주는 처음이었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패키지여행을 했다. 당연히 한라산 등반은 생각조차 없었다. 그 뒤로 제주는 여러 가지 일로 자주 방문하게 되었으며, 웬만한 지역은 거의 다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한라산 산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 번째 시도는 15년도 더 되었을까, 관음사를 통해 등산하다가 중간정도 관목지대에 이르면서 그늘도 없고 땡볕을 받게 되자 집사람이 너무 힘들어해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다. 두 번째 시도는 제주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아서 시간이 부족해 한라산 등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시도는 작년 여름휴가 때로, 성판악 코스로 아들과 함께 셋이서 등산했으나 비가 너무 쏟아져 2/3 지점되는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입산통제를 하는 바람에 정상을 밟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하게 되었다.

이번이 4번째 시도다. 2개월 전에 불현듯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과 수도권의 거의 모든 산들을 가봤는데, 정작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 정상을 아직 올라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 동안의 산행에도 불구하고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화룡정점, 오직 한라산 정상 등반만을 목적으로 토요일 오후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돌아오는 스케쥴을 검토했다. 집사람이 부담을 느꼈는지 혼자 다녀오란다. 곧바로 비행기표 예약을 마치고 제주에 사는 죽마고우에 연락하여 함께 등반하기로 결정했다.

2주일 전에 의무방어전 치르다가 너무 과했는지 우측 고관절이 이상하다. 상체를 약간 숙인 상태로 하중을 받거나 고관절을 바깥쪽으로 약간만 움직여도 통증이 상당하다. 아마도 고관절을 싸고 있는 바깥쪽 인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성호가 이걸로 1년간을 고생한 것인가? 일단 고관절을 가능한 한 중립위치로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관절에서는 가벼운 운동도 해서는 안된다. 1주 전에는 청계산에서 전지훈련을 해야 하고, 집에서는 맨손으로 하는 체력단련을 해야 하는데, 몸만들기에 차질이 생겼다. 마침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데 핑계대고 다음 기회로 미룰까?

화요일날 성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심하다고 한라산 등반기를 빨리 올리란다. 저번 주로 착각했나보다. 수요일날 병호와 통화할 때, 왜 혼자는 못가고 가이드나 포터를 동반하냐고 시비다. 인물사진이 없으면 인증 샷이 없다고 무효라고 우길 때는 언제고. 이 와중에 계획을 연기했다가는 그놈들 비아냥에 견디지를 못할 것 같다. 다행히 5일전부터는 통증이 약간 호전되는 것 같다. 날씨는 하루방에 맡기고 일단 강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토요일 오후 7시 50분 비행기로 제주를 향했다. 친구 집 부근에 짐을 풀고 친구와 함께 자리물회를 안주로 한라산(제주 토종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아쉽지만 내일을 위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날 친구와 6시에 만나 설렁탕으로 아침을 때우고 관음사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등산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니 7시다. 관음사는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절이라고 한다. 많은 절을 본건 아니지만 특이하게 느껴진 점은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 잘 다듬어진 길과

길 좌우에 있는 석불의 받침이 돌조각들을 쌓아서 만든 것이었다.

뒤쪽으로는 원래의 관음사 목조건물이 5채 정도 있으며, 수행 도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절을 지나 등산로 입구를 찾고 있는데 길이 막혀있다. 주변에 있는 길 4군데 모두 가봤지만 마지막에는 막다른 길이었다. 때마침 새벽 기도를 마치고 가는 보살님들께 물었더니 잘못 왔다는 것이다. 차도로 걸어서 20분은 더 가야한다. 아뿔싸 친구만 믿었는데... 관음사 등산로에 들어서니 7시 30분이다. 30분간 또 알바한 것이다.

15년이 지났지만 예전의 길이 기억난다. 예전에는 흙과 돌로만 된 길이었는데, 그 사이 폭우로 등산로가 망가져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2군데 생기고, 목침을 이용한 나무계단이 군데군데 생겼다. 친구와 어릴 때 추억들을 얘기하면서 오르다 보니 어느덧 삼각봉 대피소(1,500m)에 도착했다.

대피소 뒤에 있는 봉우리가 아마도 삼각봉인것 같다.

 제수씨가 준비한 쑥떡과 과일로 요기를 했다. 포도가 이제 막 제철인지 전혀 시지가 않고 달다. 콩을 넣은 쑥떡이 매우 쫄깃쫄깃하다.

열명이 넘는 죽마고우들 중에 현재 만나고 있는 친구들은 4명이다. 목포에 1명, 제주에 1명, 서울에 2명, 나까지 모두 5명이서 ‘목온회(목포 온금동 모임)’를 이어오고 있다. 제주 친구는 아버지가 신민당 당원으로서 당시 김대중 선생의 정치 활동을 도왔지만, 집안은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가 행상으로 4명(친구는 셋째)의 자식들을 부양했다. 당연히 먹고 살기도 힘들어 교육을 시킬 수가 없어 초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이후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워 지금은 직접 구두를 만들어서 파는 싸롱(양화점)을 운영하고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FM으로 통한다.

왕관바위를 쓰고 있는 친구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그늘이 없는 뙤약볕에 깔딱의 연속이다. 밑에서 볼 때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으로 신비롭게만 느껴졌던 봉우리와 암벽이 어느덧 내 발 아래에서 나를 바라본다.

초기 침식상태(위)와 침식의 마지막 상태(아래)

왕관바위를 지나니 운해도 내 발 아래에 머물게 된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오랫동안 자라면서 서로 동화되어 바위인지 나무인지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고산지대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일까?

정상에 오르니 12시 30분이다. 예상대로 5시간 걸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우선 백록담을 잘 볼 수 있는 위치를 잡고 3전4기의 기쁨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록담 우측

백록담 중앙

백록담 좌측

이어서 정상 인증 샷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백록담에서 친구와 함께

백록담에 서다

인증 샷

사진 배경의 운무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잠깐사이에 백록담이 운무에 가려져 버린다. 이처럼 백록담에 물이 잠겨있고 운무에 가리지 않은 날이 흔치 않다고 하니 하루방에 감사 또 감사.

제수씨가 정성스레 만든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1시 15분경에 성판악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조금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열심히 촬영하고 있다. 야생 노루 한 마리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다.

하루방께서 덤으로 노루까지 선물로 주신 것 같다.

화재가 국내 정치와 동북아 정세로 흘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비교적 서로의 의견이 비슷하지만 가끔은 서로 다르기도 해서 열띤 공방이 오간다. 친구는 주로 TV 토론회를 통해서 시사에 접근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중퇴 후 무작정 상경하여 구두 일을 배우면서 삶이 힘들고 절망적일 때면 혼자 산속에 들어가 일주일이나 열흘정도 텐트생활하면서 자연과 대화하고 온다고 한다. 이후로 등산은 친구에게 유일한 삶의 도피처이자 구원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놈의 이름도 “산”이다. 특유의 성실함과 도덕성으로 안정을 빨리 찾았고, 본인의 불행했던 과거를 거울삼아 좋은 가장이 되려고 많이 노력해왔다. 이같은 삶의 결과인지 보편적인 사회적 윤리 기준에서 벗어나면 전혀 이해하려들지를 않는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시간이 자나면서 서로의 의견이 접근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느덧 진달래밭 대피소이다.

관음사 코스의 삼각봉대피소와 같은 높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폭우로 입산통제를 받았던 곳이다. 등산로에 물이 넘쳐 무릎까지 차기도 해서 하산하기도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하루방께서 허락을 했더라면 지금쯤 북한산을 종주하고 있겠지. 8월은 휴가로 쉬고, 불수사도북의 마지막 관문인 북한산 종주는 9월에나 해야 될 것 같다. 대피소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커피를 마시는데 500원 짜리 커피가 맛으로 치자면 5만원 짜리는 되는 것 같다. 사향노루똥커피는 그정도 될려나?

대피소를 지나고 전체거리의 절반정도 내려왔을 때 염려했던 우측 고관절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산 속도를 줄이고 좌측 하체를 더 많이 이용하고 스틱으로 우측 하체의 하중을 분산시켰지만 이미 나타난 통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산 속도를 늦출 수밖에. 다행히도 쉼 없는 대화로 지루함은 떨칠 수 있었다. 성판악에 이르니 5시 30분이다

하산 3시간정도 예측했는데 1시간 더 걸린 셈이다. 택시를 타고 관음사로 갔다.

원래 계획은 사우나에 들러 냉수에 알탕을 하고 회를 먹기로 했으나, 친구 왈, 본인이 잡는 것 이외는 제주에 자연산이 없고, 대신에 아주 유명하고 맛있는 아구찜이 있으니 그걸  먹자고 한다. 오래전에 산행보다는 바다낚시로 취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제주에 정착한지 20년이 넘었으니 한라산과 오름은 웬만큼 다 다녀봤고, 바다는 남성미가 넘치며 가끔씩 잡히는 고기들로 자연산 회를 즐기기에는 충분하다고 한다. 물때를 맞히는 것이 중요한데, 완전히 물이 빠졌다가 1/3정도 물이 들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제법 낚시꾼 냄새가 난다. 오늘 산행을 위해서는 한달전부터 몸을 만들었고, 오늘이 지나면 다시 산행할 일이 없을 거라고 한다. 그만큼 바다에 푹 빠진 것이다.

중1 아들놈과 제수씨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가 얼마나 가정적인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행복하다는 말은 없었지만 오가는 대화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불행했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몇 배는 더 행복해야 할 것이다. 집사람에게 주는 제수씨의 조그만 선물은 뜻밖이었다. 이번 산행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FM 친구와 3전4기의 한라산 등반.

9시 15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집사람과 아들놈이 새롭게 보인다. 제수씨 선물로 집사람의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다. 졸려 죽겠는데 옆에서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는다. 집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