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을 마음에 품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시간과 체력 및 공룡의 위용에 눌려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에, 민영이의 공룡 비상기를 보고서 여름휴가 때 공룡을 타기로 결정했다. 걱정이 되었으나 그만큼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기로 했다.

출발 3일전에 일부 몰지각한 친구들(성호, 보해)이 이미 사고 난 것처럼 고사까지 지내더니, 더한 친구가 문자 메시지로 공룡능선에서 40대 아저씨가 추락사 했다는 소식까지 전한다. 저녁 뉴스 시간에 추락사고 소식을 전하면서 최근에 9명이 공룡능선에서 추락사 했다고 한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잘못되면 공룡의 품에 안기는 것밖에 더 없지 않겠는가?

휴가 첫날 쏠비치에서 쉬고 있을 때 걱정이 되었는지 민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신이가 친구들과 함께 있다고 나오라고 한다. 일찍 자야 되는데 여름밤 바비큐 파티 공연이 끝날 줄을 모른다. 가족들이 즐거워하니 함께 할 수밖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간밤에 포식한 상태) 이미 준비한 음료와 음식을 배낭에 챙긴 후에 집사람을 깨웠더니 일어나지를 못한다. 소공원까지 에스코트 해준다고 했었는데 어제 늦게까지 너무 피곤했나보다.

5시 20분 : 소공원 출발

6시 5분 : 비선대 도착

9시 40분 : 마등령 도착

14시 20분 : 공룡 완주

15시 30분 : 양폭산장

17시 30분 : 비선대

18시 30분 : 소공원 도착 -> 무려 13시간 10분이나 걸렸다.

비선대 갈림길에서 마등령 길로 접어들자마자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는 직벽 길이다. 이 상태로 800미터를 올라가야 중간 능선길이 나오면서 숨을 약간 고를 수 있다. 3.5리터의 물이 가장 큰 짐이 되었다. 마등령까지 다섯 번 이상을 쉬어간 것 같다. 힘들기도 하고 비경을 감상하기도 할 겸. 예정 시간보다 35분이나 지연되었다.

금강굴 입구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천불동 계곡 쪽의 봉우리들, 천불동 계곡 안에서 보면 계곡의 침식면과 그 침식면에서 떨어지는 폭포들을 합해서 천불이라 하지만, 이곳에서 보면 숲 위로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천불처럼 보인다. 마등령을 오르면서 시각을 통해 공간여행을 떠난다. 별유천지비인간, 선계도 수미산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같은 비경들이 마등령 산행 내내 이어진다.(34)

마등령 중간 지점에서 본 공룡능선의 허리부분으로 이 같은 소봉들이 공룡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이어져 있다. 맨 뒤쪽의 세 개의 봉우리처럼 보이는 곳이 신선대(공룡의 끝 부분), 이곳에서 설악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공룡 꼬리 바로 앞에 대청, 중청, 소청봉이 있으며, 삼청의 왼쪽에 화채능선이 있고, 오른쪽에 서북능선이, 그 안쪽으로 용아장성이 있다. 꼬리(신선대)에서 머리(마등령)를 향했을 때, 오른쪽이 외설악, 왼쪽이 내설악이 된다. 남설악은 삼청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35)

공룡의 몸통부분으로 맨 우측에 1275봉이 보이고, 우측 3분의1 지점에 보이는 첫 봉우리가 범봉이다. 범봉과 1275봉 사이에 멀리 보이는 것이 공룡 꼬리 끝인 신선대로 생각된다. 범봉 왼쪽으로 수많은 봉들이 뻗어 내려가고 있는데 공룡능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공룡의 갈기 모습이다. 맨 뒤로 하늘과 맞닿은 능선이 화채능선이고, 중간 좌측의 가장 높은 봉이 화채봉 이다.(40)

맨 오른쪽부터 나한봉, 큰새봉, 1275봉이 있으며, 맨 왼쪽 끝에 범봉이 있고, 1275봉과 범 봉 사이 중간에 뒤로 멀리 떨어져서 보이는 것이 신선대이고, 신선대와 1275봉 사이의 가깝게 보이는 봉우리들이 7형제봉이다.(37)

마등령 거의 정상부분에서 본 공룡의 머리 부분이다. 맨 오른쪽 무명 봉이 일명 마등령 봉이라 한다. 바로 그 왼쪽에 있는 3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W sign) 봉이 나한봉, 왼쪽 2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봉이 유명한 1275봉이며, 나한봉과 1275봉 사이에 있는 조그만 봉을 큰새봉이라 한다. 이 세 개의 봉을 함께 보면 거대한 익룡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1275봉 왼쪽에서 꼬리부분으로 아스라이 이어져가는 무명의 수많은 봉들이 보인다.(41)

공룡능선 머리에서 꼬리로 진행할 때 우측으로 보이는 내설악의 용아장성의 암릉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가야동계곡이 보인다. 서북 주릉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좌측은 외설악으로 마등령과 천불동 사이가 된다. 이제부터는 시각을 통한 공간여행과 동시에 청각을 통한 시간여행을 떠난다. 바람을 타고 백악기 공룡의 시대로 간다. 수시로 출몰하는 랩터들의 위협적인 울음소리, 진동이 심해 땅에 바짝 엎드려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티라노사우루스의 포효, 따뜻한 햇살 아래서 여유 있게 풀을 뜯고 있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허밍 소리...(44)

1275봉을 지나면 곧바로 기암괴석의 입석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을 7형제봉 이라한다. 찍고

보니 맨 좌측의 맏형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비경에 취해서 한 컷 했는데 나중에 7형제봉임을 알게 되었다.(46) 수시로 나타나는 랩터들의 위협으로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 정도도 양호한 것이다.

아쉽게도 사진은 여기까지(공룡능선 중간 지점)이다. 전날 가족들과 함께 쏠비치 리조트(지중해에 연한 스페인을 테마로 한 건축물)에서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면서 2/3를 소비했다. 원래는 산행 때만 사용하기로 했었는데 딸래미가 사진기 달라고 해서 안 줄 수가 없었다.(본인 것은 가져오지 않았음)  다음은 쏠비치 공연 두 컷

신선대에서의 조망을 담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부족하지만 앞부분에서 사진 대신에 글로써 간단하게 서술했으며, 신택이 글을 참조하자면 공룡 기점 사진이 바로 신선대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것이다. 땡볕을 예상했지만, 햇볕과 바람, 운무, 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공룡 통과 시간을 예상보다 20분 단축한 것이다.

양폭산장에서 비선대까지의 천불동 계곡이 왜 그리도 긴지. 공룡을 내려와 양폭산장까지는 그런대로 컨디션이 양호했다. 민영이 말대로 마등령에서 한번 죽고, 공룡에서 또 한번 죽고 나니 아무 생각이 없다. 어깨는 굳어 있고, 엉덩이 관절과 무릎 관절이 좌우를 번갈아 가면서 시큰거린다. 왼쪽 발바닥은 물집이 잡혔는지 걸을 때마다 쓰려서 발가락이 오므려지면서 절뚝거리게 된다. 내가 생각해봐도 영락없는 패잔병이다.

성호가 그렇게 감탄해마지 않던 천불동 계곡의 장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한 몸이지만 천불동을 느끼기 위해서 시선을 여러 곳으로 돌려 본다. 별 느낌이 없다. 아마도 공룡의 비경으로 아직도 시공의 여행이 끝나지 않아 천불동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으리라. 푸른 숲 사이로 백색의 암릉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면서 뻗어 내려가는 공룡의 비경은 금강산이나 장가계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불동 계곡은 금강산의 구룡 계곡에 비한다면 한참 떨어져 보인다.

소공원을 향하면서 공룡의 비경과 감동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 후기를 쓰지 않기로 생각했다. 어설픈 글재주로는 공룡의 참 모습을 왜곡할 것만 같아서이다. 회장님의 집요함과 강압에 못 이겨 글을 쓰지만 역시나 글재주의 무능함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두번 다시는 공룡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은 꼭 가야만 하는 곳이다. 산을 좋아한다면.